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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은 신체 일부에 타인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새겨진 이름’이라 불렀다. 이는 대략 십여 세대 전에 처음 발견되었다는,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이 ‘새겨진 이름’의 의미를 알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한다. 검은 이름자가 죽음을 불러오는 사람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라는 소문 때문에 이름의 주인을 찾아가 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긴 혼란기를 거치며 밝혀진 최종적인 결론은 ‘새겨진 이름’은 영적 동반자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은 부부뿐만 아니라 의형제, 맹우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평생을 함께하며 진실한 벗으로 남아줄 사람을 알려주었다.

  새로운 혼란이었다. 이 결론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분해방운동의 주장에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다. '몸에 새겨지는 이름'의 상대는 신분의 귀천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현상이 아닐까. 그전까지 노비들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형태로 진행되던 신분해방운동은 조금씩 다양한 계급의 공감대를 사기 시작하며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듯 상위 계급에서는 새로운 전통이 나타났다.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문화를 전통이라 이름 붙이는 염치없음이 놀랍지만, 어쨌든 '전통'이란 이름하에 이루어졌다. ‘새겨진 이름’의 평등성에 저항하는 정치적 동맹 방식이었다.

  정치적 결합을 원하는 가문은 자기 가문 아이를 ‘약속의 아이’ 삼아 한 명씩 내세워 등허리에 상대 가문 아이의 이름을 새겼다. 만약 그 아이에게 자연적으로 다른 이름이 발현되면 즉각 제거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름이 새겨진 아이들은 동맹의 상징이자, 자연이 내린 평등한 법칙에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오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약속의 아이’는 일종의 인질답게 가문에서 가장 불필요하고 천한 태생의 아이로 선정되었다.

 

 

2

 

 

  나는 ‘약속의 아이’다.

  동시에 너 역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너의 얼굴조차 모르지만 네가 태양이 가장 뜨거운 날 태어났음은 알고 있다. 급조된 전통의 절차에 맞게 네 생일날 뜨거운 불맛을 보았던 탓이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이 낙인으로 인해 집안에서 조금이나마 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언제나 싸늘하던 어머니는 이날 이후로 나를 다정히 품어주시기 시작했다. 어찌 생각하면 축복이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상흔이었다. 너도 이해해줄지 모르겠다. 자기 쓸모가 오로지 낙인에 의해 결정된 어린 상징물의 아픔에 대해서 말이다.

  너의 이름은 어린 내게 너무도 잔인했다. 잊어보고 싶어도 도처에 네가 있었다. 해가 뜨면 너는 양지마다 나타나 기어이 내 머릿속에서 숨 쉬었다. 사람이 어찌 태양으로부터 도망치랴. 나는 결국 너와 너의 낙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이 낙인을 방패삼아 배우고픈 것을 배우고, 누리고픈 것들을 누렸다. 원래라면 감히 요구하지 못했을 것도 서슴지 않고 얻어냈다. 나는 인질이자 낙인이지만 어찌 되었건 동맹의 상징이기에 귀하지 않으면서도 귀히 여겨져야 할 기묘한 위치에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능청을 떨어댔다. 그래도 내 속내를 터는 일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를 능구렁이 같은 놈이란 뒷말을 듣게 되었다. 얼굴 모를 너와 화해하고 싶어 발버둥 친 시간이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닫도록 했던 것 같다. 대신 나는 너에게 문을 연다. 너도 외롭더냐, 아프더냐. 나를 생각할 때는 어떻더냐. 네 이름자엔 날개(翔)도 달렸는데 나 데리고 어디 멀리 날아갈 마음은 없느냐. 두 살 어리다는 그를 동생 삼아 친구삼아, 비밀 애인 삼아 누구에게도 주지 못한 마음을 쏟았다.

 

* * *

 

  이제 다시, 유월이다. 언제부턴가 이맘때쯤 되면 낙인이 사정없이 가려워 오곤 했다. 울음이 날 듯 서글픈 가려움증이었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네 이름을 만지작대려는 때, 문밖에서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주 오랜만의, 서늘한 목소리였다.

“테츠로.”

  방에 들어와 앉은 어머니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오래도록 침묵하다 불쾌한 듯 말씀하셨다. “네 등의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 그 이름이 가문을 등졌다더라.” 더러운 것을 담듯 조심스레 덧붙이신다. “해방운동을 한다지.”

  나는 답할 말을 잊는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너의 이름은 잔인하다. 결국 나를 홀로 두고 날아가는구나. 이상야릇한 배신감이 들었다. 낙인에 연대의식이라도 생겼던 모양이다.

“주인어른께서 이름을 지우는 의식은 그놈의 이름을 새겼던 날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신다. 하지란다. 다행히 곧 그날이니 준비해두어라.”

“어머니.”

  어머니는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으셨다. “그 가문과는 새로이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름은 네 동생이 새긴다.” 그래, 이렇게 ‘쓸모’가 다한 탓이었다. 나는 그 냉랭한 어조에 말문이 막혀 “네. 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저 그렇게 답했다.

 

  히나타.

  아니, 명확히 말하자면 쇼요.

  나는 밤이 깊도록 내내 너에 대해 생각했다. 등허리의 낙인은 이제 화상처럼 뜨거울 지경이었다. 나는 감정 조절 능력을 잃은 사람처럼 실실대다가 또 다음 순간에는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붙잡았던 끈이 제멋대로 날아가 실성했나 보다.

  순간, 그림자가 불쑥 일렁인다. 문가에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간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저쪽에서 먼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ㄱ” 입을 떼려는데 상대가 쉬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테츠로 형이지?” 친숙히 부르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나 모르지? 그치만 형은 날 알아. 나 좀 들어가도 돼?”

  속삭이는 어조로 모순된 말을 한다. 단어마다 쾌활함이 튀어나온다. 밝은 소년이었다.

“모르는데 아는 이가 어디 있느냐?”

“나, 쇼요야. 테츠로 형.”

  노래하듯 이름을 읊는다. 나는 ‘해방운동’을 하러 갔더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 너의 손목을 붙잡았다. 얼른 방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는다. 반사적 행동이었다.

“어찌 여기를 왔어.”

“형이 함께 날아가자고 해서 찾아왔어.”

  나는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굳었다. 다시 낙인이 욱신거려 저절로 등허리로 손이 갔다. 너는 할 말이 급해 나의 혼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은 낙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난 말이지. 좀 우습다고 생각했어. 이전에도 이해관계만 맞으면 잘도 한패가 되던 사람들이 왜 굳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거야? 결국 새겨진 이름을 조롱하겠다는 하찮은 이유로 제일 쓸모없는 아이에게 낙인을 찍는 거잖아?”

  동요 없이 바라보는(실상은 단지 당황했을 뿐인) 내가 저를 내치기라도 할까 봐 겁을 먹었는지 손을 붙들고 다급히 설득한다. 쾌활했던 어조에 미약한 두려움이 섞였다.

“너는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쓰겠다. 나는 내 낙인이 그런 의미라고 생각했어. 조롱을 위해 소모되는 아이라는 모멸감이 들었어. 형. 그거 알아? 도망친 노비가 붙잡혀오면 낙인을 찍는 형벌을 내린대. 우리에겐 이미 낙인이 있어. 그러니 도망쳐서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어? 형과 나는 낙인이 강제로 연결한 동반자이자, 운명이 이어준 동반자니까, 함께 가주지 않을래?”

  나는 두서없는 말들과 애절함에 찬 눈빛을 보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선은 네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꼬맹이. 좀 갑작스럽지만 나도 떠나는 것에는 긍정적인 생각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단지 내가 궁금한 건 내 마음을 네가 어찌 알았느냐는 거야. 운명의 동반자라는 네 표현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응? 그래? 형도 아는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네.”

 

  너는 등 돌려 상의를 슬쩍 걷었다. 달빛에 익숙한 이름이 아른아른 빛났다.

  “자아, 이건 내 낙인이고,”

  갑작스레 바지를 내려 고개를 휙 돌렸다.

“뭐하는 짓이냐.”

“이게 내 동반자의 이름이야.”

  민망해서 돌아보지 못한다 생각했는지 슬쩍 웃는 소리가 난다. 나는 욱하는 마음에 다시 너를 보았다. 벗어든 바지를 허리에 둘러 적당히 가리고 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허벅지 안쪽이다. 나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이름’이었다.

“봐, 쿠로오 테츠로. 형의 이름이야. 난 이걸 발견하고 나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살아왔어.”

  손가락이 절로 뻗어나가 내 이름자를 짚었다. 부드러운 살 위로 이름자국이 느껴졌다. 청승맞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낙인 없이도 서로의 동반자였다는 거지. 형은 그런 적 없었어? 갑자기 어딘가가 가려워지거나 목소리가 들리거나. 분명 형도 그랬을 텐데. 영혼의 동반자들은 상대의 감정을 느낀대. 종종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형의 목소리를 들었어.”

  나는 다시 한 번 등허리의 낙인을 만졌다. 뜨겁고 서글펐던 통증이 혹 너의 감정이었을까. 내 손길을 지켜보던 네가 등 뒤로 돌아와 나를 앉힌다. 상의를 말도 없이 훌쩍 올렸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자기 이름자를 살핀다. 가벼운 숨결이 닿아 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면 낙인을 내보이기도 처음 있는 일이다. 너는 손가락을 들어 닿을 듯 말 듯 만져본다. 그 조심스러운 대우에 마음이 치밀어올랐다.

  “형!”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으응?”

  너는 짐에서 거울 두 개를 꺼낸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예상이라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이름을 볼 수 있도록 앞뒤로 하나씩 세운다.

“이것 볼래? 자세히 보면 쇼요(翔陽)에서 翔의 삐침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 아무래도 형은 낙인 위에 이름이 새겨졌나 봐. 신기하지!”

 

  나는 날아오를 듯 쾌활하게 삐친 翔의 글자를 보았다. 한껏 날며 조롱의 낙인을 조롱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넋을 빼놓는다. 너는 고개 숙여 네 이름 위에 입을 맞췄다. 흠칫 놀라며 앞으로 몸을 뺀 내게 능글맞은 웃음소리를 낸다. 돌아앉아 얼굴을 보니 너는 도망자라기엔 지나치게 충만한 얼굴이었다.

  “형, 떠나자. 나와 함께 정해진 굴레에서 탈출해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자.”

  바닥에 내려앉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갠다. 나는 그 온기에 조금씩 정신을 찾았다.

 

“이 꼬맹아. 형님이 정신 빼놓은 틈에 양껏 휘둘러대는구나.”

“이쯤 휘두를 줄 알아야 형이 내 사람이 되어주지.”

  그 맹랑한 미소에 온전히 마음을 굳힌다. 애초에 하고픈 말은 하나뿐이었으나, 속내를 올곧게 내놓는 일이 처음인지라 얼마간 머뭇거리고 나서야 꺼낼 수 있었다.

“오야, 네겐 못 당하겠구나. 가자.”

  돌아오는 기쁜 표정에 옮아 나도 모르게 마주 미소한다.

“곧 하지야. 하지가 되는 날 밤에 다시 올게. 그때 떠나자. 알겠지?”

  너는 몸을 일으켜 바지를 입는다. 누가 보면 마치 일이라도 치른 줄 알겠구나, 괜한 전율이 일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네게 문득 말한다.

 "생일, 미리 축하해.”

  너는 나를 미안한 듯 돌아본다. 아마 네 머릿속에도 그 날이 있겠지. 우리가 서로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지. 

“형, 축하는 다시 만나는 날 해줘.”

  뺨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날아간다. 등 뒤를 지켜보니 까마귀 날 듯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나는 홀로 남아 내내 낙인 위의 이름을 만졌다. 날이 밝아올 즈음엔 미련 없이 짐을 챙겨 이불장 구석에 넣었다. 오랜 족쇄에서 벗어난 양 홀가분하다.

 

  이제 나는 오로지, 하지를 기다린다.

낙인 위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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