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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오늘 밤중에는 장마의 영향으로 비가 오는 곳도 있겠으나, 내일 하루는 구름 없이 해가 쨍쨍한 하늘을 볼 수 있겠습니다. 내일 심야부터는 다시 본격적으로 비가 내릴 것 같으니까요, 늦은 저녁까지 외출 하시는 분들은 우산을 챙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최저 기온은…….

 아까 들었던 낭랑한 기상캐스터의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가방 속에 챙기던 짐 속에서 우산을 빼내었다. 밤늦게까지 연습한다고 해도, 인터하이 예선이 끝난 지금은 심야라고 부를법한 시간까지는 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수건과 져지, 체육복이 들은 가방이 우산 한 개 분량 만큼 가벼워졌다.

 

 해가 쨍쨍한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던 기상캐스터의 말대로, 오랜만에 이른 아침의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그만큼 아침 기온도 제법 높았고, 장마기간인지라 습도 또한 높았다. 아침부터 끈적이는 공기에 속으로 짜증을 내며 부실에서 아침연습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습도 때문에 자꾸만 피부에 달라붙으려는 옷을 겨우 떼어내 갈아입고 서둘러 체육관으로 향하니,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에 타케다 선생님이 나와 있었다. 뛰다시피 하여 부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꾸벅 인사하니 타케다 선생님이 눈짓으로 인사를 받아주며 입을 뗐다.

"아침이지만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현재 체육관 내부에 물이 새서 지붕 보강공사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서 내일은 체육관 사용이 가능하도록 해준다고 하니, 오늘은 오후에도 연습 없이 바로 귀가하시면 됩니다. 다들 오늘 하루 컨디션 조절 잘해서 내일 봅시다. 이상!"

 다들 들뜬 음색으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지붕 보강공사 같은 건,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옷과 함께 피부에 휘감기는, 아까보다 높아진 습도에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짜증을 냈다.

"오늘 비 온다고 했던가요?"

"저녁 늦게 온다고는 하던데, 이 정도 습도면 오후에도 내릴 것 같은걸."

타나카가 묻고 다이치가 대답했다. 그래. 이 정도 습도면 오후에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우산도 없는데.

 

 점심을 먹고서 한참 나른할 시간, 수업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 스가와라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침의 날씨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하늘에는 스가와라의 머리칼 같은 색의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오후에도 비가 내릴 것이라던 다이치가, 기상캐스터보다 더 정확했다. 창문에 한 방울씩 빗방울이 줄을 그어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야부터 비가 본격적으로 내릴 것 같다고 했으니까, 이 정도라면 맞으면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스가와라의 그런 생각을 비웃듯이 하교시간이 되자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차라리 비가 이만큼 쏟아지니 시원했다. 습도가 높아 습기만 떠다닐 때와는 달리, 그것이 아주 방울져 떨어져 내리니, 시각적인 효과도 있었고, 실제로도 비가 내리며 기온이 조금은 서늘해 진 탓도 있었다.

 현관에 서서 손을 지붕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순식간에 손바닥에 물이 고일 정도로 비가 내렸다. 이 비를 맞으며 갈 순 없는데. 그렇다고 집에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도 없었다. 현관에는 스가와라같은 사람이 몇몇 있었다. 아마, 다들 일기예보를 믿고서 고작 몇 백 그램 가방을 가볍게 해보겠답시고 우산을 가방에서 빼낸 사람들일 것이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던 스가와라는 그냥 뛰어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훈련 하나도 안했는데. 지금 조금 뛰지, 뭐. 이 정도로 내리면 맞아도 시원할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쏟아지는 비는 금세 스가와라를 적셔갔고, 스가와라의 예상대로 습도만 그득하거나 부슬부슬 비가 내릴 때 뛰는 것 보다 시원했다.

 그러나, 스가와라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지금 쏟아지는 비의 양이었다. 잠깐 사이에 마치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머리며 얼굴이 다 젖은 것은 물론이고, 옷도 흠뻑 젖어서 피부에 척척 달라붙었다. 심지어 신발 속에도 물이 들어차서 달릴 때 마다 물이 퐁퐁 신발 밖으로 솟았다. 가방도 물이 고여 떨어질 정도였으니, 아마 가방 속도 다 젖었을 것이다. 집까지 중간지점은커녕, 1/3도 도달하지 못한 채, 스가와라는 앞에 보이는 버스 정류장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벽돌을 쌓아 만든 정류장이어서 비를 피하기에 좋아보였다.

"아, 정말 일기예보 믿을 거 못되네."

 정류장 안쪽 가장 깊은 곳, 벤치가 있는 곳 까지는 비가 거의 들이치지 않아서 바닥에 쌓인 먼지마저 보송보송했다. 벤치 위에 가방을 놓은 스가와라는 심난한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장마가 시작되면 종일 비가 내리던 예전과는 달리, 장마철 비가 열대성 폭우로 바뀌어 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 했다. 학교에서 출발할 때 보다 비가 수그러든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잠시 쉬며 비가 조금 더 수그러들길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흠뻑 젖은 옷에 체온을 뺏기지 않기 위해 물기를 조금이라도 닦아내려고 했다. 가방 속의 수건을 꺼내기 위해 벤치 위에 올려둔 가방을 본 스가와라는,

"아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물에 빠지다시피 한 상태인데 가방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사실, 짐작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상태가 더 심각했다. 안쪽도 많이 젖었겠지. 노트랑... 아, 휴대폰은 괜찮나? 가방 속 소지품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처참함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이미 젖어버린 건 어쩔 수 없다며, 수건을 꺼내 비틀어 짰다. 그러고는 교복 밖으로 드러나 있는 팔과 목 등을 닦아냈다. 그러나 옷이 젖어있는 상태라 다시 피부를 타고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 옷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음, 하고 아주 잠깐 고민한 스가와라는 고개를 내밀어 버스 정류장 밖을 살폈다. 비는 점점 수그러들어가고 있었고, 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차피 안에 티셔츠 입었으니까.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스가와라는 교복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속에 받쳐 입은 옷이 있다고 해도 왠지 꺼려지는, 아우터가 아닌 옷을 벗는다는 행위에 조금은 긴장을 했지만 물에 푹 젖어 쉬이 벗겨지지 않고 팔에 걸린 셔츠에 조금 짜증을 내고 말았다. 한참을 버둥거리며 셔츠를 벗은 스가와라는 옷도 수건마냥 힘주어 짜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잦아든 빗소리보다 훨씬 큰 소리로 촤아 소리를 내며 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기다릴 걸. ...응?"

 정말, 거의 그치다시피 한 비를 보며 한탄을 하고 있는 스가와라의 귀에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휘파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스가와라는 누군가 지나가나 보다 생각하며 이번에는 티셔츠의 아랫부분을 말아 쥐고 짜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촤아 소리를 내고 있는데,

"스가와라 상?"

낯익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다.

 밝은 주황빛의 머리, 조금은 아담한 체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기분 좋게 만드는 표정, 그러나 그 얼굴과 눈빛은 언제나 진지한, -멋진 후배.

"히나타...?"

 히나타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는 스가와라를 바라보더니 황급히 자전거에서 내려 스가와라에게 달려왔다.

"스가와라 상!"

 조금은 날카롭게 불린 이름에 퍼뜩 정신이 든 스가와라는 코앞까지 다가온 히나타의 젖은 머리칼을 보고는 수건을 집어 들어 빗물을 털어주었다.

"히나타, 감기 걸리겠어. 우산도 안 쓰고 뭐하는 거야."

"스가와라 상이야말로, 감기 걸리겠어요."

 히나타는 스가와라의 말에 제 쪽이 더 걱정된다는 듯 한 말투로 스가와라의 손을 치워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제 가방에서 져지를 꺼내 스가와라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히나타, 옷 다 젖어. 어차피 나는 다 젖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집에 가서,"

"안돼요."

 히나타의 옷이 젖을까봐 어깨에서 걷어내 히나타에게 돌려주려는 스가와라의 손길을 단호하게 저지한 히나타는 다시 스가와라의 어깨에 제 옷을 둘러주었다.

"스가와라 상이 감기에 걸리면, 음, 제가 많이 슬플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대로 계세요."

 스가와라는 약간 울상이 되어 말하는 히나타를 보고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어깨에서부터 따뜻하게 온기가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히나타는 스가와라의 손을 끌어 벤치에 앉히더니 그 앞에 서서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는 수건을 꺼내 팔랑팔랑 털어 스가와라의 머리 위에 얹었다.

"히나타...?"

"머리, 말려드릴게요. 정말 감기 걸리겠어요."

 아까부터 내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히나타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스가와라는 그대로 얌전히 앉아있었다. 히나타는 머뭇거리며 스가와라와 무릎을 마주한 채로 서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꾹꾹 짜내기도 하고 털기도 하며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거친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에 스가와라는 그만 풉 하고 웃었다.

"히나타, 혹시 여동생 머리도 직접 말려줘?"

"네? 네. 나츠 머리는 스가와라 상보다 길어서 말리는 데 시간이 더 걸리지만요. 목욕하고 나서 머리 말려주면 꾸벅꾸벅 졸고 있어서 귀여워요."

 앞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후배는 어느새 자상한 오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츠 부럽네, 히나타 같은 멋진 오빠도 있고."

"앞으로 스가와라 상 머리, 제가 말려드릴까요?"

 스가와라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을 못하겠네, 하고 말을 하려는 때에, 히나타가 갑자기 스가와라의 머리칼 사이로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히나타?!"

 스가와라는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비명처럼 히나타의 이름을 불렀다.

"우앗, 죄송해요, 스가와라 상. 저도 모르게 나츠한테 하던 버릇이..."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으, 정말 죄송합니다."

 히나타는 연거푸 사과를 하더니 스가와라의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저기, 스가와라 상."

"응?"

"혹시 향수 뿌렸어요?"

"응? 그런 걸 내가 뭐 하러 뿌려."

"스가와라 상한테서 너무 좋은 향이 나요."

"음, 향수 같은 건 안 뿌렸는데. 샴푸 냄샌가?"

 스가와라가 히나타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이, 히나타는 머리를 털어낸 수건을 꾹 짜서 스가와라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마 이 자상한 후배는, 제가 하고싶은대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 할 테니, 스가와라는 그냥 히나타가 하고싶은대로 두기로 했다.

 스가와라의 오른쪽 어깨를 짚고 선 히나타는 목 뒤로 두른 수건으로 이마와 콧등을 닦더니 뺨을 닦으며 스가와라의 눈물점 위를 더듬었다. 얌전히 눈을 감은 채 히나타의 손길을 받고 있던 스가와라가, 눈을 떠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던 그 때, 히나타가 평소보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가와라 상. 스가와라 상은 참 예뻐요."

 스가와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제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하는 히나타가 조금은 낯설었다. 스가와라는 갑자기 귓가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히나타, 남자한테는 예쁘다는 말이 칭찬은 아니야."

 시선을 옆으로 빗기며 스가와라는 말했다. 히나타는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씨익 웃었다.

"그런가요. 그래도, 스가와라 상은 예뻐요."

 말을 마친 히나타는 다시 스가와라의 턱과 귀 근처를 닦아주고 목덜미 근처까지 닦아내더니 멈칫 하고 손을 멈추었다. 스가와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히나타는 붉어진 얼굴로 냉큼 수건을 스가와라에게 넘겼다. 스가와라의 하얀 티셔츠가 푹 젖어 맨살이 그대로 비쳐보였다.

"몸은, 스가와라 상이 직접 닦는 게 낫겠죠?"

"응, 머리 말려줘서 고마워."

"스가와라 상, 얼굴이 빨개요. 꼭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목욕 하고 푹 쉬세요. 정말로 스가와라 상이 아프면 슬플 것 같으니까요."

 히나타는 스가와라에게 신경을 쓰느라 제 얼굴이 붉어진 것은 모른 채, 잔뜩 걱정 어린 목소리로 스가와라에게 말해왔다. 스가와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깃든 잠깐의 정적 사이에 더 이상 아까 같은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류장 밖을 내다보니 비가 거의 그친 채 한 두 방울만이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걷혀가며 그 사이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히나타의 주변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햇빛이 비쳐 마치 히나타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참, 언제나 반짝이는 아이. 이름만큼이나 다른 사람에게 따스하게 기운을 전하는 아이.

 스가와라는 또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비 이제 다 그쳐가네요. 스가와라 상도 바로 집으로 가세요. 가셔서 꼭 따뜻하게 하셔야 해요. 아셨죠?"

진지한 얼굴로 아까부터 했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히나타에게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자 히나타가 자전거에 오르며 인사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내일 봬요!"

 멀어지는 히나타의 등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손만 흔들었다. 잘 가, 내일 봐. 이 간단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면 꼭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히나타를 전송하던 손을 내려 왼쪽 가슴께를 눌렀다. 오랜 시간 움직임이 없었는데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고, 얼굴과 귀는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스가와라에게 감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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