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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일’이 있었던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부랴부랴 일어나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토스트를 베어물다가 시계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다녀오겠습니다-인사를 하고 헐레벌떡 집을 나서는, 그런 아침. 발을 동동거리다가 도착한 엘레베이터에 급하게 타고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이고 대강 구겨 신은 운동화를 바로잡고 있는데, 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열린 엘레베이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두 층 아래 사는, 익숙한 주황빛 머리칼의 꼬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파란 가방을 매고 폴짝거리며 엘레베이터에 올라탄 꼬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묘하게 신경쓰이는 시선에 큼큼, 헛기침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뭐하고. 가만히 줄어드는 숫자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1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오자 발을 뗐는데…

 

“형아, 나랑 결혼해요!”

 

 생글거리며 나름 당차게 말하는 목소리에 놀란 나는 한 걸음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넘어질 뻔 했다.

 

 네가 내게 인생 최초의 프러포즈를 선사했을 때 너는 열한 살이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니까, 열한 살 짜리 초등학생이 열일곱 살 짜리 고등학생한테 청혼했다, 이 말이다. 초등학생이! 남고생한테! 당황스러운 마음에 나는 네게 무작정 나오는 질문을 내뱉었다. 결혼이 무슨 뜻인지는 아니? 당연하죠! 저 열한 살이나 먹었다구요! 그러게, 열한 살이면 결혼이 뭔지 모를 나이는 아닌데. 속으로 중얼이며 네 대답에 아무렇지 않게 수긍해버린 나는 이윽고 더 큰 당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래서 나랑, 어, 날?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너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너무나도 당당한 말투로 선언해버렸지.

 

“좋아해요, 형아!”

 

 아니 그러니까, 물론 다른 여러가지 문제도 많지만, 너는 일단 초등학생이라니까? 지금 형이랑 장난하는 거지, 으응?

 

…라고 생각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으윽.

 

“좋아한다니까요, 형.”

 

 6 년이다. 그 날 이후 무려 6 년 동안 너는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매일같이 네 마음을 고백해왔다. 좋아해요, 결혼해주세요, 결혼이 이르면 연애라도 해요, 기타 등등. 한때 그 감정을 어린 마음의 착각이라고, 아니면 옅은 장난기 묻은 가벼운 호감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너의 그 길고도 끈질긴 애정 공세 끝에 그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뭐, 진심이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더 문제잖아! 매일 밤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불을 걷어찼다. 도대체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우린 둘 다 남자고, 나는 너보다 여섯 살 연상이고, 너는 미성년자, 나는 성인이고, 나한테 너는 그냥 영원히 아랫집 꼬마일 뿐이고! 어떤 날은 정신을 차려 보니 쓰던 레포트에 온통 네 이름 천지더라. 히나타, 히나타 쇼요, 히나타 쇼요, 히나타… 내가 얼마나 너 때문에 고민이면 이런 짓을 하고 있겠어, 응? 듣지도 못할 네게 중얼중얼 원망을 쏟아내다가 어린애한테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자괴감까지 들었다. 조용히 좀 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는 덤.

 

 그나마 네가 눈에 좀 보이지라도 않으면 덜 싱숭생숭할텐데, 안타깝게도 너는 나와 달리 선천적으로 어마어마한 친화력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 말인 즉슨, 너는 우리 어머니와 친했다. 하긴, 그렇게나 시도때도 없이 나를 쫄랑쫄랑 쫓아다녔으니 우리 어머니가 너와 가까워지지 않을 수가 없지. 오늘도 너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네 집마냥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어머니, 저 왔어요! 헤실거리는 웃음을 입은 붙임성 좋은 인사에 어머니는 또 좋아서 싱글벙글이시더라. 누가 네 어머니니, 얘야. 속으로 꿍얼거려 보아도 네게 닿을 리가 없다.

 

“형한테 공부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괜찮죠?”

“어휴, 당연하지! 쇼요는 아무 일 없어도 와도 돼.”

 

 어쩜 저렇게 죽이 척척 잘 맞을까. 내가 체육계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부 물어보러 왔다며 뻔뻔하게 내뱉는 너와,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호 웃으며 네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를 답답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미치겠네, 참. 오늘도 어머니는 과일 한 접시를 가져다 주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겠고, 너는 생글거리며 감사하다고 대답하곤 방 문을 조심스레 닫아버리겠지. 그러고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겠고.

 

 그리고 놀랍게도 정확히 그대로 되었다.

 

 내게로 꽂히는 곧디 곧은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어 손톱만 바짝바짝 뜯는다. 그러다 괜히 핸드폰을 바라보고, 앞에 펴 놓은 책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이내 무엇에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쭉 내민다. 네가 갑자기 푸스스 웃는다. 나는 눈에 띄게 움찔하곤 너를 스윽 바라본다. 네가 놀랍도록 따스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차마 그 눈을 바라보지는 못한다. 네 손이 천천히 뻗어진다.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눈을 꾹 감는다. 손은 앞머리에 와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진다. 앞머리에 뭐가 묻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네 목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형.”

 

 장난기 가득한 말투다. 나는 부루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작게 틱틱대는 불평을 쏟아낸다. 내가 대답을 해야지 알겠냐, 너는? 하지만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은 질문이었다는 듯이 네가 또 입을 뗀다. 귀엽다, 형. 웃음기가 잔뜩 배인 간지러운 말에 예전같으면 화들짝 놀라며 무슨 소리냐고 더듬더듬 쏘아붙였겠지만, 이젠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어디서 반말이야, 이게. 손을 쭉 뻗어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먹일 뿐이다. 아니, 귀여우니까 귀엽다고 하죠! 그러니까 어디서 반말이냐고 바보야! 바보 아니거든? 또, 또!

 

 한참을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네가 숙제를 해야 한다며 가방을 뒤적인다. 형, 진짜 도와줘야 돼요. 나 이거 혼자서 못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한 너는 책상 위로 교과서와 공책을 꺼낸다. 공책 사이에는 이것저것 종이들이 끼워져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파일이라도 들고 다니지, 저걸 다 공책에 끼우고 다니냐. 당장이라도 타박 아닌 타박을 하고 싶었지만, 나도 저 나이 때엔 비슷했다는 것이 떠올라 속으로만 슬쩍 핀잔을 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으로 향한다. 어어, 형, 나 버리고 어디 가요! 또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 네게 시끄럽다고 해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많이 꽂힌 것도 없는 책장 한 켠에 자리를 잡은 안 쓰는 파일 몇 개를 뒤적이다, 적당한 것을 꺼내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이거 써.”

 

 툭 내밀어진 투명한 파일에 너는 잠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본다. 뭐해, 안 받고?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듯 묻는 말에는 급기야 화들짝 놀라기까지 한다. 바보. 나는 네 품에 파일을 떠넘기듯 안겨 준다. 이거 너 쓰라고, 공책에 죄다 끼워서 다니지 말고. 그다지 상냥하지 못한 투로 호의를 뭉뚱그려 보려고 하지만, 이미 너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강아지 같네, 골든 리트리버 정도 되려나-하는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게 네 뒤에서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꼬리를 그려 보고 있다. 형, 하고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정신을 다시 차린다.

 

“고마워요, 정말.”

 

 뭐 대단한 걸 준 것도 아닌데 반응이 좋다. 감동받았다는 투로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너의 모습에 왠지 머쓱해져 시선을 피하며 또 툴툴댄다.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뭐 처음 주는 줄 알겠다. 매년 생일도 챙겨주는데. 내뱉고 보니 이상하게 조금 묘한 기분이 든다. 누구 생일을 이렇게 오래 챙겨주는 것도 네가 유일할 거다, 아마. 나는 그렇게 누군가와 깊이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순간 네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미안하다는 생각으로 번진다. 나 같은게 어디가 좋다고, 어디 예쁜 구석이 있다고 이렇게 몇 년 씩이나 매달리는 걸까. 너는, 나를 왜 좋아할까. 괜히 복잡하게 머릿속을 채워오는 생각의 타래들을 걷어내려고 애쓰다가, 나는 네 생일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러고 보니까, 너 곧 생일이네. 뭐 받고 싶은거 있어?”

“에에, 이번에도 서프라이즈는 없는 거예요?”

 

 시끄러, 바보야. 또 가볍게 딱밤을 놓고는 재차 묻는다. 뭐 받고 싶냐니까? 사줄게. 지난번 입금된 아르바이트비가 얼마나 남았는지 떠올려보다가, 고등학생 생일 선물 사줄 돈 정도는 있겠지-하고 생각을 한 구석으로 밀어넣어 버린다. 고민에 잠긴 너를 보며 나도 다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네가 나를 따르겠다며 배구를 시작하던 해에는 배구화를 사 줬었고, 둘 모두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책을 사 준 적도 있었다. 너는 배구화를 받은 자리에서 갈아 신고는 토스를 올려 달라고 했었고, 어떻게 책을 사 올 생각을 했냐며 깔깔 웃기도 했다. 네 생일은 나름 너와 내 사이에 추억을 쌓는 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니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거렸다. 이상하게 기분은 나쁘지 않은 그런 울렁거림. 그리고 그 사이 너는 마음을 결정했는지 형, 하고 나를 불러온다. 아까보다 조금 무게가 실린 목소리에 나는 또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 역시 받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어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네 눈동자가 맑으면서도 짙다.

 

"나한테 필요한 건 형밖에 없어요."

 

 전에 볼 수 없던 너의 진지함에 나는 순간 압도당해 숨이 턱 막히고 만다. 네가 장난으로 보일 만치 가볍게만 해오던 고백들의 무게가 한 순간에 현실이 되어 심장을 조이고 누른다. 네가 진심이라는 것이 느닷없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다가와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네 눈빛에서 네가 원하는 것이 오직 나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차마 회피할 수 없다. 네가 이런 분위기도 풍길 줄 아는 사람이었나? 방금의 네 눈빛은, 네가 풍기는 느낌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네가 내 머릿속의 그 어린아이가 아님을 깨닫자 다시 속이 울렁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너는 예쁘게 웃는다. 뭐, 제일 좋은 선물은 형이 나랑 사귀어주는 거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무릎보호대 사 주세요. 천진하게 덧붙이는 말에서는 아까의 네가 한 치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또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었다가, 이상하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울렁이는 속도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상하고, 이상한데... 나는 문득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을 부정하려 애를 쓴다. 그래, 내가, 내가...저 꼬맹이한테 설렜을리가, 그럴 리가 없어. 없잖아, 그치?

 

 하지만 내 입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아예 생각이라는 것을 잊고 순간의 감정과 충동에 의해 사고를 치고 만다.

 

"너, 내가 너랑 사귀면 뭐 해줄 수 있어?"

 

 이 입이 방정이다. 난 잘못 없다. 지금 저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다. 입이 한 거다, 자기 맘대로 입이 해 버린 거다! 말을 해도 어쩜 저렇게 한심하게 할까, 머리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지만 가슴은 위에서 내려오는 불만들을 싸그리 무시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내 앞의 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긴, 나도 믿을 수가 없는데 너는 오죽하겠니.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네게 나는 재차 묻는다. 바보야, 너 나랑 사귀면 뭐 해줄거냐니까? 너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뱃속의 울렁거림이 순간 긴장의 뒤틀림으로 바뀐다. 아니, 근데 나는 왜 긴장하지?

 

"딱 하나 빼고 다 할 수 있어요."

 

 딱 하나? 나는 조금 불만스러워진다. 해줄거면 다 해준다고 하지, 딱 하나는 또 뭐야? 그러나 네가 다음으로 뱉어낸 말에 나는 또다시 숨이 막혀버리고 만다.

 

"형 혼자 두는 거 빼고, 다 할 수 있어요. 그건 형이 해달라고 해도 못해."

 

 또다, 아까의 그 소년이 아닌 녀석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지금의 너는 어린 아이의 분위기가 아니다. 어쩌면 여태껏 늘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한참 컸는데, 나 혼자 너를 아랫집 꼬마에 가두어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이상하게도 나는 울렁거림이 이제 천천히 위로 올라오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명치를 지나, 가슴께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목구멍을 타고 혀끝에 올라앉는다. 동시에 머리끝에서는 열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생각을 마비시킨 뜨거움은 천천히 흘러내려 귀끝과 목덜미를 붉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이건 꼭...사랑에 빠진 여고생같은 반응이잖아. 나는 너한테 마음이 없는데, 없는 게 맞고,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번에도 입술은 나와 조금 생각이 다른지, 살살 벌어져 혀 끝에 올라앉은 것을 토해낸다.

 

"있잖아, 나 지금 좀 헷갈리거든."

 

 내가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네게 관심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좀 정신이 나간 건지. 내가 지금까지 너를 내치지 않은 게 네가 신경쓰여서인지, 아니면 그냥 이상한 변덕이 몇 년씩이나 계속된건지. 내가 너를 소년이 아닌 남자라고 느낀 게 내가 설렜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위에 착각을 해 버린건지. 하나도 모르겠고, 너무 헷갈려서 죽겠거든.

 

"그러니까, 좀만 더, 좀만 더 해봐. 확인해보게."

 

 내가 널 좋아하는게 맞는지.

 

"...너무 빨리 오지는 말고."

 

 말을 하면서도 내 얼굴이 붉어져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나지막히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너무 부끄러워져 버린 나머지 시선을 피하고 만다.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지라 네 반응을 살필 수가 없다. 너는 뭐라고 할까, 희망고문이라고 할까? 혼자 오버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 네 표정을 살피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가 없다. 방금 엄청 쪽팔리는 말 한가득 뱉어버렸으니까.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드디어 네 목소리가 들린다.

 

"나 자신 있어요, 형. 이런 말 한다는 거 자체가 형이 아예 마음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니까."

 

 예상 외로 밝은 목소리에 나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너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태양과 같이 뜨겁고도 맑은 눈빛에 나는 차마 다시 고개를 숙일 수가 없다. 홀린 듯이 너를 바라보다가 네가 다시 뱉는 말에 현실로 돌아온다.

 

"좋아해요."

 

 형도 나한테 이 말을 곧 해줄 수 있도록, 내가 확신을 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네 목소리가 정말 무엇보다도 자신이 넘쳐서 나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영원히 꼬마일 줄로만 알았던 네가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알 수가 없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리는 것만 같다. 여전히 나는 네게, 너는 내게 눈을 마주치고 떼지 않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정적이 흐른다.

 

 정적을 깬 것은 또 너의 목소리다.

 

"형 진짜 귀엽다."

"또, 또 무슨 소리야, 바보야!"

 

 아까와 똑같은 말이 다르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나는 더듬거리며 쏘아붙인다. 기분이 영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게 이상하다. 아니 사실, 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간에. 나는 더 이상 부끄러운 말을 들을 자신이 없어 허둥지둥 말을 덧붙인다. 너, 숙, 숙제 해야 한다며! 빨리 숙제 펴! 애써 네 눈을 피하며 하는 말에 너는 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네. 분부대로 합지요. 묘하게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나는 습관처럼 짜증을 부리려다가 얼굴을 붉힌다. 또, 또 네 어린애같지 않은 모습이 생각나버렸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히나타 쇼요!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불평같지도 않은 불평을 마음에 새긴다. 진짜, 네가 내게 영원히 아랫집 꼬맹이에 불과할 거라는 말 전격 취소다.

 

"근데 형, 이거 영언데 풀 줄 알아요?"

"내가 영어 같은 걸 알겠냐?"

"에엣, 대학생인데?"

"어디서 은근슬쩍 반말이야, 반말은!"

 

 왜요, 우리 곧 사귈 거 아닌가?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다.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진짜. 어, 아니라곤 안 하네요? 조용히 하고 숙제나 해!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고 책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큰일났네, 이러다가 진짜 생일 선물로...아악, 생각 안 할래!

 

 어쩌다 이런 애한테 쩔쩔매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이런 애한테 코가 꿰이게 생겼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입가에 미소가 살짝 피어오른다.

Love Sick

Love Sick - 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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